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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글을 쓰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정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강원도 삼척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동생들이 많다보니 공부도 많이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몇 개월 다니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 후 서울이란 낯선 곳으로 상경하여 영등포에 있는 봉제공장에 취직하였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월급의 대부분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보내드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며 혼기도 놓치고 결혼도 못했지만 불평불만 없이 착실히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관 련 글[밝은세상으로] - 개인회생 힘든 생활속에[밝은세상으로] - 제발 숨쉬고 살고 싶습니다.[밝은세상으로] - 이제와 생각해보니 저의 어리 그런데 제가 이지경에 ..
채무자가 개인회생을 신청하게 된 구체적 사정 채무자가 개인회생을 신청하게 된 구체적 사정 고교졸업 후 송파구에 있는 롯00드의 용역회사에 취업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2004년도에 주위에서 마이너스통장을 만들면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고 하여 우리은행에서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쓰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2007년경 제 나이도 있고 해서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얼마 후 병원 기계실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000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귀기 전에는 몰랐는데 사귀고 난 후 그녀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빚은 000의 친 오빠가 보청기제조 및 판매 사업을 하는데 회사경영이 어려워져 동생명의까지 빌려서 대출을 받았는데 그 대출금이..
제발 숨쉬고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부모님께서는 맞벌이를 하셔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에 18살부터 취업하게 되어 27살까지 성실하게 샤넬 유한회사에 근무 하였습니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던 중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에 호감이 가서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환경이 좋지 않아 부모님 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배우자랑 행복하게 사는 게 저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교제3개월밖에 안되었지만 그 사람의 인성과 성실함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견례를 하고 보니 그 사람에게는 빚1억5천이 있었고 집도 경매에 넘어간 상태이며온가족 모두 시아버님의 주식으로 억대의 빚을 모두가 떠안고 있었습..
이제와 생각해보니 저의 어리석고 미련하고 1975년 충북에서 1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어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셨는데, 일하는 날보다 술에 취해계신 날이 더 많았고, 그렇게 술을 드신 날이면, 어머니를 비롯해서 저희 남매를 그리도 몰아댔습니다. 어머니의 눈언저리는 멍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젊은 여자를 불러들였습니다. 이때부터 저희 남매는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오랫동안 지속된, 지독한 가난과 폭력은 저희 남매 에겐 아직까지도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관 련 글[밝은세상으로] - 진심으로 부끄럽고 참회[밝은세상으로] - 도박에 유흥비 탕진으로 [밝은세상으로] - 난 이렇게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1997년 12월 IMF경제위기 상..
진심으로 부끄럽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진심으로 부끄럽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남편, 아버지로써 많이 부끄럽습니다. 저희 잘못된 한순간의 판단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아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저는 1982년 경북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경운기로 모래를 실어 나르는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가사일을 하셨습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 저희 6남매를 키우시는 부모님을 보고 저는 제 아이들이 용돈을 달라 할 때 못주는 그런 아빠는 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2010년 회사 직장 동료인 배우자 000를 만나 결혼하여 슬하에 1남1녀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배우자 000씨는 동시에 퇴사를 하게 되었고 가장의 ..
도박에 유흥비 탕진으로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도박에 유흥비 탕진으로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광양시 광영동에서 1980년 부모님 슬하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000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는 건축현장의 노동일을 하시며 저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고, 어머니께서는 가사 일을 하셨습니다. 넉넉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으나 처음에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을 하였으나 제가 초등학교 2학년에 어머니가 아버지와 불화로 인하여 집을 나가신후 아버지는 약주를 매일 하시며 힘든시기를 보냈었습니다. 그러던중 새어머니와 3차례 걸쳐 재혼을 하셨으며 중학교 1학년에 아버지는 암말기로 돌아가셨고 그후 친 어머니께서 서울에서 내려와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그 와중에 4차례 새 아버지와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 환경속에서 저는 힘든시련도 많았지만 저는 한가..
난 이렇게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난 이렇게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고교졸업 후 가락동내에 있는 청과물 시장에서 경리 일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1994년경 뜻하지 않은 임신이 되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고 결혼 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지경까지 오게된 이유는 2000년경 남편이 유통업을 하면 적은 자본으로 큰돈을 벌수 있다며 성남 시청 앞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유통회사를 차렸습니다. 나홀로 개인파산 가능하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당시부터 많은 사업자금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남편은 자기 명의의 대출과 제 명의로 대출을 받아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경험도 없이 시작한 사업이다보니 매달 적자만 보게 되었고 남편은 곧 괜찮아 질것이라며 저를 안심시켰으나 남편의 사업은 계속해서 적자만 볼뿐..
개인회생 힘든 생활속에 개인회생 경위서 힘든 생활속에 저는 1958년 전남해남에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11살에 아버님께서는 5남매의 어린자식들을 어머님께 맡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참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어머님께서는 저희 6남매를 많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아무 탈 없이 키워 주셨습니다. 개인회생 경위서 제출하기 전! 80년도 초에 결혼을 하여 아들과 딸을 얻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게 없었기에 가난을 벗어나고자 우리가족은 서울이라는 낯선 곳으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우리가족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습니다. 직장을 따라 여기 저기 옮겨 다니다 보니 어렵고 힘든 시간에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얼마기자 않아 애들은 할머니와 고모 손에 맡겨지고 우리 부부는 떨어져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